Travel, Places/2017 일본 여행

35. 쿠마노코도 순례길을 걷다.

zzoos 2020. 10. 1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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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숙 코사카야의 조식. 간단하지만 푸짐한 느낌.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조식이 8시까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온천민숙 코사카야(温泉民宿 小阪屋本館)의 조식은 간단했다. 미소시루에 낫토, 쯔케모노 한 종류와 생선구이, 날달걀과 김구이. 후식으로는 바나나 하나. 평범하고 손이 별로 갈 것 같지 않은 구성이었지만 의외로 든든했다. 낫토에 달걀을 함께 풀어서 한참을 휘휘 저은 다음 밥 위에 올려 먹는 것을 처음 배웠다. 낫토와 달걀의 조합이라니.

 

오늘은 쿠마노코도를 잠깐(?) 걸어 보기로 했다.

 

오늘의 계획은 쿠마노코도(熊野古道)를 실제로 걸어보는 것. 오전 중에 두세 시간 걷고 나서 점심을 먹고 오사카로 돌아가는 길에 한두 군데 포인트를 더 들러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음,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뭔가 설명을 해줬지만, 나의 일본어 실력으로 100% 알아듣는 것은 어려웠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다이몬자카(大門坂)라는 표시가 나온다. 이제부터 순례길의 시작이랄까.

 

조식을 마치고, 짐을 정리해서 숙소 앞에 모였다. 민숙 쥔장 부부와 함께 단체 사진도 찍고(굳이 포스팅은 하지 않;;;) 인사를 나눈 다음 목적지로 출발. 차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주차장을 찾을 수 있었다. 차를 세워두고 표지판을 따라, 구글맵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쿠마노코도 다이몬자카(熊野古道 大門坂)가 나타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순례길의 시작인 걸까?

 

이 때는 몰랐다. 몇 걸음 앞에 엄청난 경치가 펼쳐질 거라는 걸.

 

쿠마노코도(熊野古道)는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의 황실에서 신들의 영지, 천계와 지상이 만난다는 쿠마노(熊野) 지역(현재 와카야마현과 미에현의 접경지 부근)으로 순례하러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당시 수도인 교토부터 쿠마노까지의 순례길은 약 3~40일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고 하는데, 왕복인지 편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쿠마노코도(일본어 발음표기 때문에 구마노고도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는 2004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순례길은 전 세계에 딱 두 개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길은 그저 걷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경치에 압도 당했다.

 

처음,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와 다이몬자카를 봤을 때는 좀 시시했다. 주택가 뒷산을 올라가는 것 같은 작은 골목, 그리고 그 입구에 세워둔 표지석 같은 느낌이었달까? 아, 정말 좁은 산길을 따라 순례를 다녔나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딱 열 걸음 정도를 더 걸어가니 갑자기 울창한 숲속으로 접어들었고,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니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경치가 나타났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듯 곧게 뻗어 있는 나무들이 커다란 돌을 깔아 넓게 정비된 길의 양옆에 서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상하게 정감가는 음료. 라무네(ラムネ)

 

30분쯤 걸었을까? 울창한 숲길이 끝나고 작은 가게가 하나 나타났다. 가게 옆에는 시원한 물을 흘려보내며 차가운 음료를 보관하는 통이 보였는데, 그 안에는 라무네(ラムネ)가 가득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음료고, 병을 여는 방식도 특이한 음료인데, 이상하게 이 음료를 보면 정감이 간다. 아! 그래! 야구왕바! 어린 시절에 먹던 아이스크림인 야구왕바가 바로 딱 이 라무네의 맛이다.

 

별로 많이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꽤 높은 곳에 올라왔구나

 

작은 구멍가게를 지나니 좀 더 본격적인 가게들이 나타난다. 어라? 산 위에 이런 번화한 곳이 나타나네? 싶었더니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신사인 쿠마노나치타이샤(熊野那智大社)에 거의 도착했다.

 

솔직히 특별할 것은 없었던 전형적인 일본의 큰 신사

 

그동안 일본 곳곳을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솔직히 말해서 특별한 풍경은 없는, 전형적인 일본의 큰 신사였다. 사진 보관함을 뒤져보면 비슷한 구도의 비슷한 사진들을 몇 장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나 할까.

 

점괘를 뽑는 통이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운세를 점치는 오미쿠지(おみくじ)를 뽑는 방법이 아주 특이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성인이 혼자 들기 버거울 정도로 큰 팔각 통을 들고 흔들면 숫자가 적힌 막대기가 나오는데, 그 숫자에 맞춰 오미쿠지를 뽑으면 된다.

 

사실 그 '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크기'가 특이할 정도로 컸다. 친구들과 사진도 찍으면서 각자의 점괘를 뽑았다. 그중에서 나의 운은 중길(中吉). 다른 친구 두 명은 모두 대길(大吉)이 나왔다. 그래, 흉(凶)이 안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혼자 여기저기 돌아보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작은 나무 조각을 들고 오더니 이름을 적으라고 한다. 셋이서 각자 이름을 적고 나니 한 쪽에 같은 것들을 모아두는 곳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나 보다.

 

신사 아래에 오래된 목조 건물이 분명해 보이는 절이 하나 있었다.

 

신사 바로 아래에 오래된 목조 건물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절이 하나 있었다. 나치산 세이간토지(那智山青岸渡寺). 앞서 보았던 화려하고 큰 신사보다는 이쪽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요함도 좋았지만, 그 고요함 덕분에 꽤 큰 규모인 건물인데도 압도적이라거나 무겁다는 느낌보다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점이 좋았다.

 

멀리 보이는 나치 폭포를 향해 걸었다. 3층탑인 타키주안(瀧壽庵)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나치 폭포(那智滝)라고 했다. 친구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멀리서도 한눈에 폭포가 보인다. 그 폭은 좁았지만 높이는 꽤 높은 폭포였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 중의 하나로, 물줄기가 하나로 떨어지는 폭포 중에서는 낙차가 가장 큰 폭포라고 한다.

 

쿠마노코도 투어 버스 중의 하나인 쿠마노메구리

 

세이간토지에서 내려오니 나치 폭포 앞의 주차장이 나타났다. 핑크색의 버스가 보이길래 사진을 찍어뒀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쿠마노메구리(熊野めぐり)라는 투어 버스. 다이몬자카와 나치산 방면의 코스를 도는 버스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높은 폭포였다.

 

소리와 규모에 놀라서 동영상도 촬영

 

주차장에서부터 폭포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조금 걸어 들어가니 굉장한 높이의 폭포가 나타났다. 이번 여행 중 야쿠시마(屋久島)에서 보았던 오코노타키 폭포(大川の滝)도 엄청 높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검색해보니 나치 폭포가 133미터, 오코노타키 폭포가 88미터로 약 50미터나 차이 나는, 엄청난 높이였다.

 

도리이를 지나 산길을 올라가면 또 다른 신사가 나오려나?

 

여기까지 약 두 시간 정도의, 산책이라고 하기엔 오르락내리락 고도의 차이가 있어서 숨이 가빠질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는, 트래킹이라고 하기엔 굳이 운동화가 아니어도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인, 순례길 경험이었다.

 

이제 우리가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길은 약 30분 정도.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다시 10분. 어제 묵었던 숙소가 있는 가쓰우라(大字勝浦) 쪽으로 내려갔다.

 

약 두 시간 반 정도 걸었으니, 가볍게 노천 족탕!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찾은 곳은 노천 족탕. 우미노유(海の湯)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바로 옆에 더 작고 낡은 다른 탕이 하나 있는데, 어차피 한눈에 다 보이는 거리. 거창하게 노천 족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라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정도의 사용법만 잘 지킨다면 누구나 발을 담글 수 있다.

 

메하리 스시 니다이메. 주먹만한 메하리 초밥과 질 좋은 참치를 맛 볼 수 있었다.

 

친구들이 점심 식사 장소로 선택한 곳은 메하리 스시 니다이메(めはり寿司二代目). 메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미스터 초밥왕의 서브 에피소드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커다란 초밥'이라는 뜻의 메하리 초밥이 있다는 걸 보고 궁금했었는데, 바로 여기서 맛볼 수 있다니.

 

일단 메하리 초밥은 커다란 주먹밥을 간장에 살짝 절인 갓으로 둘러싼 초밥인데, 부드럽고 향긋한 갓과 잘 양념 된 밥의 조화가 좋다. 사실 초밥이라기보다는 주먹밥에 더 가깝다. 거기에 가쓰우라는 참치로 유명한 지역이라 참치회가 신선했고, 밥 위에 올린 즈케는 김과 함께 어울려 감칠맛이 폭발했다.

 

여행 중에 들렀던 식당 중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식당 중 하나다. 혹시 근처로 여행하는 분이 있다면 꼭 들러보시길.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사카를 향해 출발해야 했다. 며칠 전부터 연락하고 있던 도쿄의 친구들이 오늘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한다. 부지런히 오사카로 돌아가서 신칸센을 타면 늦지 않게 도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

 

바닷가에 쭉 늘어선 기암괴석들

 

오사카로 가는 길에 하시구이이와(橋杭岩)에 잠깐 차를 세웠다. 큰길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 바로 큰길 가에 있는 곳이라 말 그대로 잠깐 들러서 경치를 볼 수 있겠다 싶었다.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 나의 선택은 귤이었다.

 

매점에 들러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세 개 샀다. 메뉴를 보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보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메뉴. 백도, 연유 딸기 그리고 귤? 나의 선택은 미깡(みかん) 그러니까 귤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백도 아이스크림은 도대체 무슨 맛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직접 봤을 때의 신비한 느낌이 사진에선 잘 살아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해변을 살랑살랑 걸었다. 친구 둘은 신나서 바위 위에 올라가기도 했는데, 나는 멀리서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확인해 보니 실제로 그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신비로운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 이럴 땐 찍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눈과 머리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여행 중에 느낀 여행의 '끝'이라는 기분

 

다시 차를 타고 신오사카역(新大阪駅)을 목적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입국하고서 혼자 돌아다닌 지 어느덧 3주가 넘었다. 그러다가 오사카의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 1박 2일 와카야마 여행. 긴 여행 중간의 짧은 여행이다. 그 짧은 여행이 끝나는 기분은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일본에서 몇 번 운전하면서 느낀 일본의 운전자들은 매너가 좋았다. 과속을 하지 않을뿐더러 깜빡이를 켜면 무조건 속도를 줄여 양보해준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운전을 참 얌전하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웬걸. 돌아가는 길, 친구의 운전은 꽤 터프했다. 속도도 꽤 내는 것 같았고, 요리조리 끼어들면서 앞질러 나아가는 운전이었다. 캬~! 역시 간사이 사람의 운전인가!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여행을 정리하며 생각하니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가야 하는 나를 걱정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려고 했던 걸까?

 

덕분에 나는 너무 늦지 않게 신오사카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도쿄로 가는 신칸센 표를 샀고, 약 두 시간 반 걸려 도쿄역에 내릴 수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도쿄역

 

도쿄역(東京駅)에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에서 주섬주섬 우산을 꺼내 썼다. 도쿄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 두 명은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도 나를 위해 도쿄역 바로 앞에 있는 이자카야를 약속장소로 정했다.

 

한국 친구들을 만났다. 진짜 오랜만에 수다다운 수다를 떨 수 있었다!

 

도쿄는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도착한 도시에 커다란 짐을 메고 우산을 쓰고 걷고 있자니 이러다 길을 잘못 찾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메야쿄마치시즈쿠(夢や京町しずく)는 도쿄역에서 아주 가까웠고, 찾기 쉬웠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고,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국 사람들과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여덟 시 즈음에 시작한 자리는 막차 시간까지 쭈욱 이어졌을 뿐 아니라, 서로를 붙잡으며 계속 마셔야 한다고 버티다가 결국 친구네 집까지 쭈욱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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