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Places/2017 일본 여행

29. 첫 여행의 추억을 걷다

zzoos 2020. 4. 29.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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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여행은 아니었지만 익숙하진 않았고, 일본 여행은 처음이었다. 여행작가인 선배 형의 인솔을 따라 고쿠라와 모지코를 돌아봤다. 2008년 12월 31일이었다. 2009년 새해를 모지코역 광장에서 맞이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는 모지코라는 도시가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여행하고 싶은 곳으로 남겨두었다.

 

2009년 1월 1일 저녁. 보수공사 이전의 모지코역사

 

2017년 10월 31일. 모지코역(門司港駅)에 도착했다. 첫 여행의 기억. 추억의 장소라 잔뜩 기대를 하고 개찰구를 나섰는데... 어라? 이게 무슨 일이야! 보수공사 중이라 내 기억 속의, 멋진 건물을 다시 한번 볼 수 없었다. 너무 진한 감정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정말이지 너무 아쉬웠다.

 

(검색을 통해 확인해보니 2019년에 보수 공사가 끝났다고 하니, 지금은 새로운 모지코역사를 볼 수 있을 듯)

 

역사는 보수공사 중이라 일러스트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예약해둔 호텔은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 큰 짐을 하나 메고 있어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택시를 타기엔 가까운 거리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별것 아닌 추억이지만 덕분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거리를 천천히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까지 걷기 시작했다. 초반의 3~5분 동안은 걷는 게 재밌었는데, 이후는 그냥 커다란 찻길 옆을 불안하게 걸어야 하는 데다가 딱히 볼만한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괜히 걸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하면서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니 모지코역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오호, 앞으로는 저걸 타면 되겠군.

 

일본에서 유명한 전설(?)인 간류섬에서의 결투

 

호텔에 짐을 풀어두고 셔틀버스 시간을 확인해보니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해서, 그냥 다시 걸었다. 짐을 내려놓으니 한결 걷기가 수월했다. 일단 내일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간몬연락선 매표소(関門汽船発券所)를 찾았다. 내일은 시모노세키(下関)를 다녀올 생각이다. 모지코에서 배를 타고 5분이면 건너갈 수 있는 데다가, 일본에서 유통되는 복어의 80% 이상을 처리한다는 도시다. 그러니 내일 점심은 시모노세키에서 복어를 먹어야지!

 

배편의 가격과 시간 그리고 승선 방법 등을 미리 체크했다. 예전에 모지코에 왔을 때도 같은 코스이긴 했는데, 당시엔 인솔하던 형님이 모든 걸 처리해주셨으니 나에겐 첫 경험.

 

매표소 앞에는 일본에서 유명한 전설(?)인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간류섬 결투를 그린 간판이 놓여 있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두 검사가 결투를 하기로 했는데, 미야모토 무사시가 일부러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해 사사키 코지로의 마음을 어지럽혀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바로 그 간류섬(巖流島)이 모지코와 시모노세키 사이의 간몬해협에 있는 섬이다.

 

간몬대교를 건너 저 멀리 보이는 시모노세키

 

멀리 간몬대교가 보인다. 이곳 모지코는 큐슈. 저 다리 건너 시모노세키는 혼슈. 일본 열도의 커다란 섬을 연결하는 다리다. 도보로도 건널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배 타고 쉽게 건널 수 있는 걸 굳이 도보로 건너고 싶지는 않았다.

 

모지코 레트로 구역을 걷는다.

 

오후 4시 정도가 되니 해는 기분 좋은 노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블루윙모지(ブルーウィングもじ)를 걸어서 건넜다. 이 다리가 예전에도 있던 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항구 너머의 풍경은 변한 것이 없다. 고풍스러운 정갈함. 복원한 건물들이 주는 어색함이 있을 만도 한데, 오히려 그 정갈함이 기분 좋은 곳이다.

 

국제 우호 기념관. 1층에 중식당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걷다가 선배 형이 설명해줬던 건물을 하나 만났다. 국제 우호 기념관(北九州市大連友好記念館).  모지코시와 대련시가 우호 도시 체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련에 있는 건물을 본떠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련에는 재정 러시아가 지어줬다고.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1층에 중식당이 있었던 기억이다.

 

모지코 맥주공방에선 맥주 한 잔~!

 

이쪽으로 걸어온 이유는 모지코 맥주공방(門司港地ビール工房)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는 지역마다 맥주 제조 공장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맥주를 지비루(地ビール)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하면 지역 맥주 정도가 되려나? 어쨌든 맥주를 한 잔하고 싶었고, 이곳에 맥주공방이 있다는 건 예전의 방문했던 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간몬해협 너머, 넘어가는 해를, 맥주잔에 담아, 원샷!

 

마침 간몬해협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공방 앞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추억을 되짚는 즐거움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설렘도 여행의 묘미 중의 하나지만, 추억을 더듬는 따뜻함도 무시할 수 없는 여행의 묘미.

 

해가 지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간몬해협은 잔잔하게 출렁였다.

 

이제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려나?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모지코역 주변의 번화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지코항의 일몰을 보며 걸었다.
(좌) 2017년의 바나나맨 둘 (우) 2009년의 바나나맨과 나

 

걷다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모지코항은 예전 남쪽 나라에서 바나나를 실어 본토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들러 운송 중에 익어버린 것들을 싸게 팔아치우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나나를 싸게 파는 거로 유명해 이런 동상이 서 있다고 하는데... 분명 2009년에는 한 명이었던 바나나맨이 두 명으로 늘었다. 그것도 딱 내가 기념사진을 찍었던 자리에 험상궂은 녀석이 서 있었다.

 

(좌) 아인슈타인이 묵었다는 구 모지 미쓰이 클럽 (우) 구 오사카 상선 모지지점

 

저녁 먹을 식당을 찾기 위해 역 쪽으로 걸어가다가 발견한 유명한 건물 두 개. 구 모지 미츠이 클럽(旧門司三井倶楽部)은 미츠이 물산의 접객 및 숙박 시설이었다고 하는데, 아인슈타인 부부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묵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2층에는 아인슈타인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은 구 오사카 상선의 모지지점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역시 이곳도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 중이라고.

 

모지코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역시 야키카레

 

오늘의 저녁 메뉴는 야키카레로 결정했다. 밥과 카레 위에 치즈와 계란을 올려 오븐에 굽는 것이라는데 모지코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많은 가게에서 야키카레를 파는데... 구글맵과 타베로그를 철저하게(?) 체크해보고 선택한 곳은 카레혼포(伽哩本舗)였다. 음, 사실은 모지코역에서 가까웠다. 그래서 이곳으로;;

 

솔직히 말해서 '이런 게 유명하다고?' 싶은 음식이었다.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닌데, 특별하지가 않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면 일본 여행객들에게 우리나라의 치즈 닭갈비가 유명하고, 치즈스틱이나 치즈볼 같은 걸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얘길 들어보면 일본에는 이렇게 '쭉쭉 늘어나는' 치즈를 잘 쓰지 않는다고. 그런 의미에서 카레 위에 치즈를 듬뿍 올린 음식은, 최소한 일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음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마음에 들었던 조그만 바. 서서 마셔야 하니 '스탠드 바'인가?

 

저녁을 먹었으니 술을 한잔해야지. 모지코역 주변을 다시 검색. 가까운 곳에 카쿠치야 이소카네(角打や磯金)라는 곳을 찾았다. 카쿠치(角打ち)라는 말은 서서 마시는 술집을 말한다. 굳이 우리말로 바꾸면 선술집, 스탠드바 정도가 될 텐데, 이미 그 단어들은 각각 다른 뜻으로 쓰고 있으니 뭐라고 바꿔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좌) 과자나 통조림캔을 사서 안주로 먹어도 된다. (우) 가볍게 쿠시카츠를 주문

 

어쨌든 정말로 '서서' 마시는 가게다. 가게 한 켠에 통조림과 과자봉지가 보이는 이유는 그걸 사서 안주로 까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단한 오뎅이나 쿠시카츠 같은 안주를 주문하면 아주머니가 느릿느릿 만들어주신다.

 

쥔장 아저씨의 밴드가 모지코역 광장에서 공연하신 적이 있는 듯

 

소츄를 오유와리(お湯割り)로 주문했다. 오유와리란 술에 뜨거운 물을 섞어서 마시는 건데, 주로 중년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이 마시는 방법이라, 내가 외국인인 걸 알면 '에? 외국인이 오유와리로 마신다고?'하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360엔이라는 가격을 보고 당연히 한 잔이 나올 줄 알았는데, 소츄 한 홉과 뜨거운 물이 따로 나온다. 360엔으로 석 잔을 만들어 마실 수 있다니, 이 가성비는 뭐지? 게다가 쿠시카츠가 각각 100엔이었다. 소츄 석 잔에 안주를 포함해서 560엔이라는 이 미친 가격은!!!

 

서서 마신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벽면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니, 쥔장 아저씨가 밴드를 하시나 보다. 2008년 12월 31일 모지코역 광장에서 신년 카운트다운을 할 때도 노년의 밴드가 공연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 공연하셨던 분일까? 싶어서 당시의 사진을 급하게 찾아봤다. 하지만 멤버들의 외모가 좀 다르다. 영화 같은 인연(?)은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가보다. 그래도 '모지코역 광장에서 노년 밴드와 함께 신년 카운트다운을 해본 외국인'이 '모지코역 광장에서 신년 카운트다운을 해본 노년 밴드의 멤버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한잔한다는 것도 절묘한 인연이긴 하지 않은가?

 

마음에 들었던 작은 바. 이소카네.

 

내일은 히로시마(広島)로 갈 예정이다. 주말에 오사카(大阪)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생겼다. 그래서 올라가는 길에 가보고 싶었던 미야지마(宮島)를 들르려고 한다. 헌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숙소 예약이 좀 어려웠다. 겨우겨우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예약할 수 있었다. 주말을 위해 오사카 숙소를 예약하려고 했더니 거기도 예약이 어려웠다. 힘들게 에어비앤비로 겨우 빈방을 하나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번 주말이 일본에서 연휴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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