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Places/2017 일본 여행

21. 태풍을 피해 가고시마로

zzoos 2020. 4. 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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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에 들어오면서 배편을 왕복으로 예약해뒀었다. 나가는 배편은 오늘 오후 4시. 이부스키(指宿)로 나가는 배였다. 지열로 덥혀진 뜨거운 모래 찜질로 유명한 이부스키는 가고시마현의 최남단에 있는 작은 도시. 야쿠시마에서의 트래킹이 몸을 피곤하게 만들 것 같아서 짠 일정이었다. 야쿠시마에서 열심히 놀고, 이부스키에서 찜질하면서 피로를 풀겠다는 야심찬(?) 계획.

 

마시다 남은 야쿠시마의 소츄 미타케. 슈퍼에서 산 귤. 미야코에서 선물 받은 시쿠와사. 가방에 짐이 자꾸 늘어난다.

 

하지만 태풍 22호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배편이 제대로 뜰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좀 급해졌다. 혹시라도 배가 뜨지 않으면 섬에 갇혀야 하니까 말이다. 일단 짐을 챙겼다.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짐이 조금 늘어나 있었다. 야쿠시마의 감자 소주인 미타케(三岳)를 반도 못 마셨다. 슈퍼에서 사 온 귤도 많이 남아 있었다. 모두 가방에 쑤셔 넣었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가? 미야노우라항에서 본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짐을 챙겨 숙소에서 체크아웃한 다음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일단 미야노우라항(宮之浦港)으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다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 정말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최대한 빠르게 섬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매표소에 가서 배 시간과 운항 상황을 확인해보니 약 한 시간 뒤에 가고시마로 나가는 배가 있어서 예약을 변경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야쿠시마를 떠나는 배를 탔다.

 

렌터카를 반납하러 갔더니 사무실 앞에 대기하는 차들이 엄청 많다. 다들 그냥 주유하러 온 건지, 렌터카를 반납하러 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야쿠시마에서 동시에 본 차량의 수로는 가장 많은 수의 자동차들. 혹시 태풍 때문에 렌터카 빨리 반납하고 배 타려는 사람들이었을까? 어쨌든 차례를 기다려 차를 반납하고서 우산을 쓰고 나가려고 하니까 '항구까지 가는 거죠? 조금만 기다려요. 비 오니까 항구까지 태워줄게요.'라는 친절한 사장님! 덕분에 편하게 토피(Toppy) 승강장까지 도착. 삼사십 분 정도를 기다려 드디어 배에 올랐다.

 

야쿠시마에서 이부스키로 나가고 싶었지만, 태풍 때문에 출항 시간이 더 빠른, 가고시마로 나가는 배를 탔다.

 

원래의 계획보다 대여섯 시간 정도 일찍 나오긴 했지만, 3박 4일간의 야쿠시마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기회가 된다면 친구들과 함께 가보고 싶은 섬이다. 이번 전체 여행을 통틀어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 중의 하나다. 그 섬을 떠나는 배 위에서 섭섭한 마음으로 지난 며칠을 돌아보니 아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아마 다시 가지 못할 곳이라 더욱더 아쉬운 곳...

 

아직은 태풍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가고시마 시내

 

야쿠시마에서 가고시마까지는 두 시간가량. 비가 내리고 있긴 했지만, 아직 바다가 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고시마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가고시마까지는 태풍의 영향권이 아닌가 보다.

 

배에서 내려 예약해둔 숙소까지 지도를 보니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 어차피 점심을 먹어야 하니 가고시마 시내 구경을 하면서 걸어가기로 했다. 분명히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비가 오기 시작할 테니 맑은 하늘의 가고시마를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작은 시골 도시일 거로 생각했던 가고시마의 시내는 생각보다 번화했지만 소도시 특유의 소박함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고, 돌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리를 걷는 기분이 괜찮았으니 호텔까지 걸어가겠다는 결심은 좋은 결정이었다.

 

점심은 간단하게 부타쇼가야키 정식

 

대충 호텔의 방향만 알아두고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적당해 보이는 가게를 하나 찾았다. 이자카야 쇼(尚)라고 쓰여 있는 간판에는 점심 메뉴도 쓰여 있었고, 문 안에는 한두 명이 식사를 하는 게 보였다. 메뉴를 살펴 보다가 알아볼 수 있는 메뉴가 하나 있어서 주문했다. 부타쇼가야키(豚生姜焼き) 정식. 돼지고기에 생강과 간장을 넣어 볶은 요리와 함께 해초(아마도 모즈쿠?), 짠지, 두부, 된장국이 함께 나왔다.

 

생맥주 한 잔이랑 고봉밥을 한 그릇 싹 비웠다. 역시 배를 타는 일은 의외로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 음식은 입에 거슬리지 않았다. 아주 맛있는 곳은 아니지만 편안한 맛이라 단골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커다란 물고기 간판이 인상적인 사츠마아게를 파는 가게

 

밥을 먹고 나오니 바로 앞에 특이한 간판이 보이길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검색해보니 토쿠나가야(徳永屋) 본점이라는데, 약 120년 정도 된 가게. 가고시마의 옛 지명인 '사츠마'라는 이름을 붙인 '사츠마아게'라는 오뎅이 가고시마의 특산물이라는데 그걸 파는 가게다. 사실 이 가게가 유명한지는 전혀 모르고 골목을 지나가다가 간판이 특이해서 혹시 나중에 하나 사 먹어 볼까? 싶어 한 컷 찍어놨는데, 공항에도 입점해있을 정도라고 하니 꽤 유명한 가게인 모양이다.

 

우연히 가고시마 시내 좋은 자리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산책하기도 좋고, 번화가도 가깝고.

 

가고시마에서 가장 큰 거리 두 개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호텔

 

발길 닿는 대로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젯밤에 예약해둔 호텔 우키아게소(ホテル吹上荘) 근처에 도착했다. 예약할 땐 몰랐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주위가 뭔가 광화문 앞길처럼 널찍널찍하길래 지도를 보니 가고시마에서 가장 큰길인 나카노히라도리(中之平通り)와 데루쿠니도리(照国通り)가 만나는 사거리에 있는 호텔이었다. 가격이 저렴하길래 잡은 호텔이었는데, 위치가 좋다. 바로 뒤에 산이 보이고, 공원도 하나 있는 듯.

 

누군지 모르겠지만 동상의 모자를 보니 해군 제독쯤 되는 사람일까?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서 짐을 간단하게 풀어두고는 바로 주변을 산책하러 나왔다. 아직 하늘이 파랄 때 조금이라도 더 이 동네를 걸어보고 싶었다. 호텔 바로 뒤에 산이 있고, 그 위에 전망대도 있으니 사쿠라지마를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자전거를 보면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동네 뒷산일 줄 알았는데 꽤 정비가 잘 돼서 걷기 편한 산책로

 

걷다 보니 가고시마 현립 박물관도 있고, 가고시마 시립 미술관도 있고, 가고시마 근대 문학관도 있다. 이 근방이 가고시마의 중심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앞이 광화문 거리라면 뒷산은 남산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박물관도 가보고 싶었고, 미술관도 가보고 싶었는데 일단은 전망대부터 올라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생각보다 힘들어서 땀이라도 흐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시원하게 식힐 수 있을 테니까.

 

 

시로야마공원 전망대에서 본 사쿠라지마
전망대에도 이상하게 '돌'을 쓴 곳이 많다.

 

근대 문학관 뒷길로 올라와서 산길을 따라 걸으니 삼십 분 정도 걸려서 시로야마공원 전망대(城山公園展望台)에 도착했다. 드디어 사쿠라지마(桜島)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건가? 기대를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태풍이 오고 있기 때문인지 하늘에 구름이 많았고, 그 구름은 사쿠라지마의 꼭대기를 가리고 있었다.

 

사실 사쿠라지마가 대단한 섬이라기보다는 소설인가 만화인가... 어딘가에서 무 중에서 가장 큰 무는 사쿠라지마의 무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서 가고시마 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한번 보고 싶었다. 뭐, 결국 보기는 본 셈이다.

 

(좌) 후지시마 타케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우) 미술관 앞 광장에 놓여있는 로댕의 조각

 

전망대에서 가고시마의 명물(?)인 사쿠라지마를 구경하고, 가고시마 시내를 내려다보고 나서 살랑살랑 걸어 내려오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은 산책길이라 땀이 흐르진 않았다. 그래도 미술관엔 들르고 싶었다. 가고시마시립미술관에서는 후지시마 타케지(藤島武二)라는 일본 화가의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특별전만 보는데도 다리가 아플 정도로 전시된 작품의 수가 상당한 양이었던 걸로 봐서 엄청 다작했던 작가였나 보다. 작품 대부분은 인상파 화풍인데 전시 끄트머리 즈음에는 아르누보 풍의 일러스트도 보였다. 전시를 보고 나니 화가에 대한 정보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봤더니, 이런 우연이 있나! 전국 자동차 일주할 때 화순에서 우연히 기념관에 들렀던 오지호 화가의 스승이다.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였다고 한다. 이번 여행들은 인상파 화가와 인연이 깊은 여행인가보다.

 

최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플래시를 쓰지 않는 경우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가고시마시립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아예 금지된 곳이었기 때문에 실내의 사진은 전혀 없다.

 

가고시마시립미술관. '시립'이라고 무시하기엔 소장품이 굉장한 곳이다.

 

특별전 관람을 마치고 상설 전시관으로 들어섰을 때 헉! 하고 놀랐다. 전시의 규모는 특별전보다 훨씬 작았지만,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모네, 세잔, 피카소, 마티스, 막스 에른스트, 달리, 칸딘스키, 앤디 워홀, 프랭크 스텔라... 어느 하나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마치 20세기 미술사를 설명하는 책을 펼쳐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 물론 각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고 처음 보는 작품들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유명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관람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전시를 관람하고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광장에 있는 조각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상설전에 전시된 작품들의 면면을 봤기 때문이었을 거다.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 설명을 보니... 헉, 이건 로댕의 작품이다. '시립' 미술관의 소장품 규모가 이 정도라고?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관람을 마치고 나니 박물관까지 둘러보기엔 시간이 좀 늦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기대에 차 있었다.

 

저녁은 뭘 먹지? 이곳은 소츄로 유명한 가고시마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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